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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소피아 성당, 하느님과 알라가 공존하는 곳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4. 27. 22:45
동·서양이 교차한 이스탄불은
도시 전체가 문명 박물관
그리스 정교 본산 소피아성당
오스만제국의 관용 덕에 살아남아
▲ 소피아성당의 내부. 이슬람 문양과 기독교 벽화가 뒤섞여 있어 성당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두 가지가 맞닿고 있음을 의미하는 경계(境界). 이 단어는 물리적인 공간 개념을 넘어 묘한 환상과 기대감을 품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이스탄불은 바로 그런 곳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절묘하게 담고 있는 공통분모이자, 과거와 현재가 선명하게 공존하는 특이한 공간이다. 아무리 벗겨내도 온전히 속내를 가늠하기 힘든 거대하고 깊은 이스탄불로의 여행은 그래서 많은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하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이스탄불을 일컬어 ‘인류 문명이 살아있는 거대한 옥외 박물관’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은 아침을 든든히 먹고 하루 종일 길을 걷기만 해도 곧 알 수 있다. 거리에서 만나는 수많은 역사 유적들로 쉴 새 없이 눈은 호강을 하게 된다.

실크로드의 흔적을 담고 있는 거대한 시장 바자르와 오스만제국 술탄의 영광을 대표적으로 표현하는 톱카프 궁전, 그리고 세계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모스크들, 로마와 그리스 유적 등. 구시가를 중심으로 1㎞ 반경에 5000년 역사의 흔적이 담겨 있어 한번에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여행자에게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세계 그 어느 땅에서도 보기 힘든 광경이기 때문이다.


▲ 소피아성당 안의 모자이크. 모스크를 박물관으로 바꿀 때 회칠을 벗겨내자 곳곳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모자이크들이 발견되었다.

동양의 정신을 간직한 터키인들과 수천년 서양의 뿌리를 담고 있는 이스탄불에서 만난 소피아성당은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성당의 내부는 오랜 세월에서 묻어나는 무게와 더불어 감히 범접하기 힘든 위엄이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이스탄불에서 소피아성당을 본 것만으로도 터키 여행은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500년이라는 세월이 믿기지 않는 당당한 건물도 그러하지만 성당 중앙에 자리한 직경 33m의 돔을 기둥 하나 없이 54m 높이에 올려놓은 기술은 참으로 놀랍다. 놀라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소피아성당을 값지게 하고, 보는 이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는 것은 바로 이슬람의 관용 정신이다. 이슬람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단숨에 걷어내게 하는 무언의 힘이 있는 것이다.


소피아성당 안에는 하느님과 알라가 공존하고 있다. 본래 그리스 정교의 본산지로 만들어진 이 성당은 오스만 투르크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후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했고 현재는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1935년 이슬람 사원을 박물관으로 개조하면서 벽면의 회칠을 벗겨내자 500년간 잠자고 있던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로 된 수많은 성화가 드러났다. 당시 그것을 본 사람의 느낌은 과연 어떠했을까.


▲ 이스탄불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으로 꼽히는 블루 모스크. 소피아성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자신의 종교와 다르면 상대방의 목숨도 거두어 가는 종교의 잔악한 또 다른 속성 속에, 선뜻 납득이 가지 않지만 술탄 마흐메드 2세와 당시 이슬람에서는 관용의 정신으로 그들의 유적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상을 섬기지 않는 그들이기에 자신들의 문양을 덧입혀 놓기만 했다. 비잔틴의 놀랍도록 아름다운 벽화보다도 그것을 파괴하지 않은 오스만제국의 관대함이 더욱 놀랍다. 그러한 모든 흔적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 바로 소피아성당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스탄불의 상징적인 단면을 보여주는 곳으로 제일 먼저 이 곳을 꼽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술탄 마흐메드 2세가 보여준 너그러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랫동안 오스만제국이 대국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슬람의 관용 정신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 어떠한 제국도 막강한 힘과 통제만으로는 오랜 세월 영화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스만제국이 500년간 드넓은 땅을 유지하고 문화를 꽃 피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관용에 기초한 국가 정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슬람은 정복 전쟁에서 승리한 후 3일간 약탈을 허락했다. 그 예외가 되었던 것이 콘스탄티노플이었지만, 대부분 진행된 약탈에서도 원칙은 엄격하게 지켜졌다. 그리고 지배하에 들어온 이교도들에게는 종교와 관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패자가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가던 당시의 상황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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