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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미 문고’를 아시나요?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4. 16. 20:31


<앵커 멘트>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지 올해로 61년이 됩니다. 되찾지 못한 것들이 많지만 아직도 일제 때 유출된 상당수 우리의 문화유산들이 국내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한 대학 도서관에는 일제 때 유출된 조선시대 고서 4천여 책이 ‘아사미 문고’라는 일본 사람 이름으로 분류돼 반세기가 넘도록 보관돼 있습니다.

‘아사미’는 누구이고, 또, 어떻게 해서 4천 책이 넘는 한국의 고서들이 한꺼번에 미국 땅으로 건너가게 된 건지 그 경로를 추적했습니다.

<리포트>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 하버드 대와 더불어 미국에서 동양학 연구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집니다. 이 대학의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인 동아시아 도서관은 한국과 중국, 일본의 고서 3백만 권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도서관 지하에는 희귀 고서만을 관리하는 특별 서고가 있습니다.

<인터뷰> 브루스 윌리암스(UC 버클리 동아시아도서관 선임사서) : “방문을 연 뒤 45초 안에 다른 안전장치에 코드를 입력하지 않으면 경보가 울리고 경찰이 출동하게 됩니다.”

서고 안으로 들어서자 누런 색 표지에 싸인 고서들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고려사,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 모두가 조선시대 책들입니다. 그 숫자만도 천여 종에 4천 여 책이나 됩니다. 하지만 책 표지에 적힌 분류 목록은 일본 사람 이름인 ‘아사미’로 돼 있습니다. 이른바 아사미 문고입니다. 전문가와 함께 이 문고의 가치를 알아봤습니다.

<인터뷰>오용섭(인천전문대 교수(서지학자)) : “한국에 없는 자료들이, 유일한 자료들이 많고 한국에 있는 책의 원본이 되는, 바탕 본이 되는 책들이 또 여럿 있습니다.”

대표적인 책이 바로 ‘청장관 전서’입니다.

<인터뷰> 오용섭(인천전문대 교수(서지학자)) : “규장각 소장의 청장관 전서의 그 바탕이 된 제본이 바로 이 책입니다. 이 책은 청장관 이덕무의 아들이 함께 펴낸 최초의 청장관 전서인 셈입니다.”

국내에서는 보물 1127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천로 금강경’도 이곳에 보관돼 있습니다. 고려 말 우왕의 만만세와 후일 창왕이 되는 원자의 천천추를 기원하기 위해 만든 책입니다. 영조 때 청계천 바닥을 준설하면서 그린 ‘준천계첩’ 역시 아사미 문고에 있습니다. 비슷한 책들은 있지만 영조에게 직접 바친 ‘준천계첩’은 이 책이 유일합니다.

이러한 유일본이 아사미 문고에는 30여 권 더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과 관련된 문헌만도 19 종에 97 책이나 됩니다. 경세유표, 목민심서, 훈훈심서와 같은 정치, 경제 서적뿐만 아니라 주역이나 매시서평과 같은 철학분야 책까지도 모두 아사미 문고에 있습니다.

<인터뷰> 황준연(전북대 윤리교육학과 교수) : “여기 버클리 대학의 다산 저술이 있다는 사실도 아는 분이 많지 않고, 또 현재까지 그 국내 본하고 여기 이 버클리 우리가 말하는 아사미 문고 본을 확실하게 검토한 경우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소중한 아사미 문고는 어떻게 해서 버클리에 오게 된 걸까? 취재팀은 버클리 대학 도서관의 협조를 받아 1910년 이후 지역 신문에 난 모든 기사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1950년에 발행된 한 신문에서 아사미 문고와 관련된 기사를 찾아냈습니다.

이 기사에는 조선 왕조나 한글을 알고 싶어하는 버클리 대학생들을 위해 이 책을 구입하게 됐다고 그 사연이 적혀 있습니다. 또, 아사미 문고를 구입하기 위해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7천 5백 달러를 지원 받았다는 내용도 들어있습니다.

<인터뷰> 데보라 루돌프(UC 버클리 도서관 선임연구원) : “아사미 전집이 가진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어요. 특히 몇몇 원본들은 아주 유일무이한 독창성을 가지고 있죠.”

1950년 11월. 아사미 문고는 샌프란시스코 항을 거쳐 UC 버클리 도서관에 도착합니다. 아사미 문고를 담은 나무상자들이 중앙 도서관 로비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버클리 도서관은 이 책들을 누구로부터 구입한 것일까?

취재팀은 미국의 한 연구 보고서에서 이 책들이 일본 미쯔이 문고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을 찾아냈습니다. 일제시대 재벌인 미쯔이 가문이 아사미 문고를 버클리에 판 것입니다.

일본 도쿄에서 60 킬로미터쯤 떨어진 도고 시. 취재팀은 1920년대 지어진 미쯔이 가문의 한 도서 보관소를 찾았습니다.

<인터뷰> 사이토 야수나리(일본 국문학연구자료관 총무계장) : “(예전에 여기에 아사미 문고가 보관돼 있었나요?) 그렇습니다. 이것은 이 열쇠로 여는데. 이런 두께의 돌탑으로 돼 있습니다.”

모든 문은 독일에서 수입한 고급 대리석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화재 예방은 물론 실내 온도와 습도를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내부가 텅 비어있습니다. 일제시대 재벌인 미쯔이 가문이 이 곳에 있던 조선 서적 4천여 책을 버클리에 판 뒤 곧바로 문서 보관소를 폐쇄했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에 상륙한 미 군정은 재벌 해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미 군정은 미쯔이에 대해서도 자산 동결 등의 조처를 내렸습니다. 돈이 궁한 미쯔이 가문은 결국 자신들이 소장하고 있던 아사미 문고를 UC 버클리에 판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쯔이 가문은 어떻게 해서 아사미 문고를 갖게 된 걸까?

일본 후쿠오카에 있는 큐슈대학. 취재팀은 이 대학 연구실에서 미쯔이 재벌과 아사미 문고를 연결하는 중요한 단서를 찾아냈습니다.

그 동안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아사미 문고의 주인, 아사미 린타로의 신상 명세서입니다. 1868년에 태어난 아사미 린타로는 동경제국대학교 법학대학을 졸업한 뒤 검사를 거쳐 판사에 임용됩니다. 1906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아사미는 통감부의 고문 변호사로 한국에 파견됩니다. 이후 1910년, 한일합방이 이뤄지자 아사미는 조선 총독부의 판사와 고등법원 판사로 활동합니다.

<인터뷰> 마쯔바라 다카토시(큐슈대학 한국학센터 교수) : “판사 생활을 하면서 조선 고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아사미는 지금 말하면 문화재 위원회 위원으로 있었습니다.”

아사미는 특히 조선시대 왕족이나 양반 집에서 나온 책들을 집중적으로 사들였습니다.

<인터뷰> 마쯔바라 다카토시(큐슈대학 한국학센터 교수) : “한일합방 이후 콜렉터로서는 한 왕자집에서 많은 책을 유출했어요. 왕자집에서요. 그 왕자집에서 나온 책들이 하나, 아사미 콜렉션의 한 일부분이 되고요.”

아사미는 이렇게 모은 조선의 희귀고서들을 1917년, 서울에 있는 미쯔이 물산을 통해 일본 미쯔이 문고로 보냅니다. 그리고 미쯔이 문고측은 이 책들에 아사미 문고라는 별도의 이름을 붙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50년 아사미 문고는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로 건너갑니다.

1918년 아사미는 13년 동안의 한국 생활을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의 모교인 이곳 동경제국대학 법과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학위 논문은 조선 법제사 연구였습니다.

하지만 아사미는 일본의 법과 제도가 고대 바빌론 제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등 당시 일본 주류 학계의 견해와는 다른 주장을 펼쳐 학회에서 추방당합니다. 취재팀은 아사미라는 인물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아사미가 마지막까지 살았던 집을 찾아갔습니다.

<현장음> “(어느 쪽으로 가는거죠?) 앞으로 가다가 좀 왼쪽으로 돌아가면 되요.”

하지만 아사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현장음> “(아사미 린타로 씨를 아시나요?) 모릅니다.”

<현장음> “(언제부터 여기 사셨죠?) 40년 전부터요.”

지역 전화국의 협조를 받아 ‘아사미’라는 성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녹취> “(아사미 린타로 씨라고 해서 도쿄대학을 나온 변호사인데요?) 모릅니다.”

아사미의 사진은 물론 그의 후손을 찾는데도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취재팀은 취재과정에서 아사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그의 논문을 몇 편 찾아냈습니다. 1910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한 월간지에 아사미가 쓴 논문입니다.

*낭독:

‘경국대전과 그 후의 법전’

아사미 린타로

“이씨 5백 년의 조선은 세계 역사와 고립돼 존재했다. 심지어 우리 일본 역사보다도 더 고립됐다. 그 때문에 조선의 문물은 매우 낙후돼 마치 일본의 헤이안 시대를 보는 듯하다.”

<인터뷰> 마쯔바라 다카토시(큐슈대학 한국학센터 교수) : “헤이안 시대라 함은요. 일본의 AD 1000년 정도예요. 그러니까 그 변형 전 사회 상태와 비슷하다고 그 당시에는 봤어요.”

<인터뷰> 마쯔바라 다카토시(큐슈대학 한국학센터 교수) : “(그러면 지금 일본보다 9백 년 뒤진 것으로?) 네, 뒤진 것으로…”

아사미는 이밖에도 북한산 정상에 있는 비석의 탁본과 고려시대 활판사적 등 한국의 문화 유산에 관해 많은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글속에 담긴 그의 사상은 일본이 한국보다 우수하다는 식민사관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아사미 문고의 미스터리를 1년 넘게 추적한 KBS 취재팀은 UC 버클리 도서관측에 아사미 문고의 이름을 한국식 이름으로 바꿀 의향이 없는지 물어봤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의 귀한 책을 일본으로 가져간 아사미 린타로의 이름을 반세기가 넘도록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버클리 도서관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인터뷰> 피터 주(UC 버클리 동아시아도서관 수석사서) : “한국의 희귀 고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한국인 후원자가 나타난다면 (아사미 문고) 대신 앞으로 후원자의 이름으로 바꾸는 방안에 대해 심사 숙고하겠습니다.”

올해로 광복 61주년. 하지만 아직도 일제 때 유출된 많은 문화유산들은 국내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사미 문고처럼 자랑스런 우리의 문화유산인데도 일본인의 이름으로 분류돼 학계에 소개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당장 국내로 들여오기 힘든 형편이라면 이름이라도 우리 것으로 바꾸도록 하는 것이 일제 식민지 잔재를 지우고 우리 고유 문화 유산의 존재를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는 또 다른 대안일지 모릅니다.


출처 - KBS뉴스[문화] 김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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